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시프 스탈린/생애 (문단 편집) == 냉전 ==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은 끝났지만, 추축국 동맹을 패퇴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미국]]과 소련은 전후 질서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했다. 스탈린은 영미와의 흥정으로 동유럽을 차지할 수 있었고, 소련의 건국 당시부터 숙원이던 완충 지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제 1세계 vs 제 2세계 간의 첨예한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냉전]]이라고 한다. 일단 전쟁이 끝난 후 스탈린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다. 1945년 6월 28일에는 자신이 영웅시한 [[알렉산드르 수보로프]]처럼 [[대원수]]의 지위에 오른 스탈린은 전쟁 당시 주춤했던 세뇌 및 숙청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일단 전쟁 중 독일 점령지에 있던 배신자들이 우선적인 [[숙청]] 대상이 되었다. [[캅카스]]와 [[발트 3국]]에 있던 여러 반소 분자들은 총살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소련군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277만 5700명의 소련군이 포로가 되었다는 이유로 여과 수용소라는 곳으로 보내졌으며, 이 중 절반은 강제 노동 수용소로 끌려갔다.[* 이들은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모두 복권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일부는 공적이 인정되어 영웅 칭호를 받는다.] 전쟁이 끝났다는 이유로 국민들을 느슨하게 다루는 것은 강철의 대원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다시 강조되었고, 국민들은 당과 정부에 충성을 바쳐야만 했다. [[비밀경찰]]은 다시 바빠졌고, 소련의 어용 언론들의 세뇌와 선전은 다시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소련은 [[나치 독일]]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나 종전 3년 만에 전쟁 전 수준으로 생산량을 회복한다. 다만 전쟁의 상흔에서 온전한 복구가 이루어진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후 복구 과정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고 성공적이었다. 제4차 5개년 계획 마지막 연도인 1950년에는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 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스탈린의 소련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을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전후 복구 과정에서 소비재 생산도 발전하면서 1947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에서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배급제를 실행했던 영국보다 7년이나 빠른 속도였고 일본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대조국전쟁을 거치면서 나치 독일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되었지만, 1948년 전후 재건의 성과로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넘어섰을 정도다. 1950년의 공업 생산량은 1940년 공업 생산량을 73% 능가했고, 소비재 생산도 23% 증가했으며 자본재의 생산은 두 배로 증가했다.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매년 12%의 공업 성장률을 보였고, 5년 동안 자본재가 80%의 성장을 보였고, 소비재 생산도 65%라는 눈에 띄는 성장을 보였다. 이런 점에서 스탈린 또한 전후 재건 과정에선 성장 및 생활 개선에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1946년 스탈린의 요약 연설에서 알 수 있다. > 우리는 점진적으로 상품의 원가를 줄이고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소비재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 향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1949년 소련은 [[소련의 핵개발|핵 실험을 하여]] 소련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끝내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스탈린은 핵을 지닌 채로 공산권 위성국들을 거느린 [[초강대국]]의 지도자로 등극한다. 냉전 시대에 스탈린이 세계 공산주의 적화의 야욕이 있었다는 식의 서방측 선전이 넘쳐났었지만, 실제로 스탈린은 세계 혁명에 대해 적극적인 노선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을 거치는 과정에서 발트3국과 핀란드, 폴란드가 소비에트 치하에 포함되지 못하면서 세계혁명론에 대해 뼈져린 한계를 느낀 베테랑 정치인으로 레닌 집권 말기때부터 자신이 집권했을 때도 일국사회주의론을 내세웠던 인물이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소련의 동유럽 팽창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반파시즘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로써 국한된 것이지, 소련이 외압을 가한 경우는 동유럽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 뿐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어쨌거나 철저한 레닌주의자였던 스탈린은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에 따라서 자본주의 국가들은 알아서 망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1차 세계 대전 이후처럼 [[대공황]]이 닥쳐와 영국과 미국의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했고 앉아서 어부지리를 취하면 될 것으로 여겼다.[* 스탈린 선집에 있는 '소련의 사회주의와 경제적 제문제'를 보면, 스탈린은 이러한 관점에 따라, 자본주의 국가들이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단결성을 무시한다고 지적했을 정도다. 즉, 미국이나 서방이 마셜 플랜과 같은 일을 해도, 사회주의 우방의 단결과 연대를 통해, 자본주의 맞서 사회주의를 확산하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그래서 타국의 혁명에 개입할 때에 그 혁명이 실패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소련의 이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과감히 행했고, 전쟁 이후엔 혁명이 벌어지더라도 소련의 이익이 침해되거나 미국과 대결하는 것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는 혁명들은 피했다. 예를 들어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군에서 아나키스트와 [[통합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독립공산당]]이 득세하자, 소련은 NKVD를 보내 공화파에서 이들을 때려잡는데 힘을 쓰다가 적전 분열을 일으켜 결국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승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베를린 위기 때도 도로는 봉쇄했을지언정 미국의 공중 수송은 막지 않았고, [[국공내전]] 때도 [[중국 인민해방군|인민해방군]]이 승리하기 직전까지 개입하지 않았고 공식적으로는 [[중화민국]]과의 외교를 끊지 않으면서 구 [[러시아 제국]]이 만주에서 가졌던 이권을 되찾는데 집중하였다. [[그리스 내전]]도 마찬가지다. 스탈린은 그리스 내전에서 소극적인 지원[* 불가리아를 통해 소량의 무기와 장비만 보냈다.]만 했을 뿐이었으며,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그리스 정부에 군사고문단 및 무기 지원을 하는데도 내버려 두었다. 그 결과 미군 고문단이 지원한 그리스 정부군은 이들의 지원 아래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25년 동안 [[그리스 군사정권|군사독재 정부]]가 그리스에 들어섰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호찌민]]을 지원한 것도 1950년이 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스탈린은 호치민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OSS와 협력했던 것과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의심해서 호찌민을 당혹스럽게 만든 적이 있었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의 독립 선언으로 탄생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스탈린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반면,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지도자 수카르노는 1947년에 소련으로부터 외교적으로 승인받았다. 그래도 호찌민이 요구한 한 가지는 확실하게 들어주었는데,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한 것이었다. 1950년 1월 30일 소련은 호찌민의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공식적인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6.25 전쟁에서도 소련군은 비밀리에 참전한 공군을 제외하면 끝까지 참전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며, [[김일성]]과 [[박헌영]]의 남침 요청을 여러 번 거절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오히려 [[마오쩌둥]]에게 김일성을 원조하라는 말을 한 이후에 '쟤가 개입 안 하겠다고 하면 우리 이웃으로 미군을 놔도 상관없다'라고 하였다.[* 6.25 전쟁 당시 스탈린은 영국인 첩자를 통해 미국의 핵 능력을 잘 파악했고 늘 두려워했다. 그는 마오쩌둥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경멸했으며 중국의 한국전 참전을 도와주지 않았다. 1950년 가을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자, 스탈린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우리의 이웃이 되도록 내버려두라"라고 측근들에게 지시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한반도 지배를 용인할 생각이었는데, 왜냐하면 미국이 중국에게 패배하면 압도적인 핵 전력을 보유한 미국(1950년에 원폭 300개 소유)이 중국과 소련(당시 원폭 5개 소유)에 핵 공격을 퍼부어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학자들은 스탈린을 20세기 최고의 [[정치현실주의]]자로 평가한다. 스탈린이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은 러시아 혁명기와 내전 당시의 뼈져린 경험에다가 직접 독소전쟁을 지휘하면서 미국의 높은 생산성과 국력을 몸소 체험했고, 동시에 전쟁과정에서 소련 전체 인구의 15% 가량이 살상당할 정도로 인구손실이 막중했던 탓에 당장 미국과 일대일로 맞붙는 것이 소련 입장에서는 엄청난 무리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소련의 서기장이자 [[소련군]] 통수권자, 그리고 연합국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서 미국이 행한 [[샤를 드골|가진 것이라고는 명분밖에 없는 키다리 지도자]]에게도 [[무기대여법|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차 수십, 수백량 이상을 제공하는 미칠 지경의 USA Loan]], 미국이 수행한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을 대상으로 한 [[양면전쟁]], 그리고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섬 반도 반동 분자들을 단번에 박살낸 악마의 폭탄 투하]]를 생생히 전달받을 수 있었던 인물이다. 소련 서기장 스탈린이 아니라 삼척동자가 봐도 신생국가 소련이 '''[[핵무기]] 기술까지 독점했던''' 미국과 충돌할 경우 남는 것은 [[일본 제국|자멸]][[나치 독일|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미소 전쟁이 소련이 미국이 가진 것 이상의 핵 전력을 보유하지 못한 스탈린 생전에 벌어졌다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었던 소련이 본토와 생산력, 경제력이 멀쩡히 살아있었던 미국을 이겼을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무기대여법]] 등을 통한 다양한 자원과 경공업, 군사적 지원, 배후에 있던 [[태평양 전쟁|일본 제국을 미국이 박살내고 있었던 상황]] 등으로 인해 소련이 마음 놓고 중화학 군사 산업을 육성하고 [[독소전쟁]]에 모든 것을 [[올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미국과 소련이 전쟁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런 지원은 당연히 없는 것이고, 소련은 독소전쟁 이상의 패널티를 가지고 전쟁을 했어야 함이 당연하다. 물론 미국의 핵개발 비화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본에 떨어뜨린 핵폭탄 두 개를 소진한 후 다음 핵무기의 준비까지 미국에게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핵이 없었다고 해서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국제역학적으로 보아도 소련에게 득이 될 것은 하나도 없던 것이, 일단 영국만 해도 [[윈스턴 처칠]]이 [[철의 장막]]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발언 당시에는 야당 대표로 말한 것이지만 발언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처칠인 만큼 흘려듣기는 어렵다. 물론 영국 정부는 전 동맹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그(윈스턴 처칠)는 일개 민간인이며 그의 발언은 영국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는 개드립을 쳤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에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고, 독일 쪽에서 보아도 [[독소전쟁]]과 [[나치 독일|나치]]의 대 소련 프로파간다, 소련군의 약탈, 미소 분할 점령 등으로 인해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프랑스는 좀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유 프랑스]]는 미국에게 진 [[무기대여법|빚]]이 엄청났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을 묵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즉 영프독으로 대표되는 기존 열강들이 소련에 친화적이지 않고 미국의 편을 들 것이 분명한 상황이다. 일본의 경우 반미 감정이야 당연히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소련의 편을 들어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일단 일본은 확실히 [[GHQ]]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었고, 이것은 서유럽을 확실히 지배하지 못한 소련과 서유럽을 확실히 지배한 미국의 극단적인 차이이다.[* 즉 미국은 일본이 미국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 있지만, 소련은 서유럽 국가들이 자신을 지지하도록 강제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또한 일본과 소련은 [[러시아 제국]], [[러시아 내전]] 시절부터 서로 치고받고 싸운 앙숙 관계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넘어 양면전쟁을 했던 만큼 소련을 동서로 나누어 공격할 능력도 충분히 있었다. 다만 양면 공격의 대상이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서 소련 서부, 동부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당시 미 해군은 [[태평양 전쟁]]을 통해 세계 3위 일본 해군을 상대하면서 급격히 팽창해 [[명불허전]] 세계 1위의 해양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송 능력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공군의 전력 또한 마찬가지. [[베를린 봉쇄]]에서 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로지 공군의 공중 수송을 통해 서베를린이라는 대도시를 지탱한 것이 미군의 수준. 이런 상황에서 대서양에서 주구장창 미군을 괴롭히던 나치 독일의 [[유보트]]와 일본 제국의 잠수함들마저 없어졌으니 상황은 더 나았다. 미국이 이런 해군력의 압도적 우세를 이용해 [[베링 해협]]과 대서양을 막아버리고 소련의 동쪽과 서쪽에서 양면 공세를 벌인다면 소련 입장에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소련의 의미있는 군항은 죄다 동유럽, 러시아 서쪽에 집중되어 있어 애초에 소련 해군이 약하지만 모항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이는 이후 냉전에서도 드러난다. 소련 해군이 미 해군의 수준을 넘은 적은 소련의 성립부터 해체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때문에 일본 제국이 당했던 것처럼 소련 역시 미국의 본토를 공격할 엄두도 못 낸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샌드백이 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소련군이 서진해 서유럽을 위협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독일을 완전히 합병하려 한다면 그것대로 프랑스와 영국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적어도 스탈린 생전의 소련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 보기도 어렵고. 이런 점을 모두 종합하면 스탈린이 세계 적화를 추구하며 공격적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지상전에서 미국에게 상당한 출혈을 강요할 수는 있을지언정 소련과 미국은 기본적으로 [[바다]]로 인해 이격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상대가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소련군이 진주한 나라에서는 소련식으로 사회를 개조하려 했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워 위성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이런 [[제국주의]]적인 태도는 나중에 동유럽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의 독자적인 혁명으로 집권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이에 반발해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스탈린 사후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56년 헝가리 혁명|소련의 간섭을]] [[프라하의 봄|벗어나려는 소요 사태]]가 일어났고, 동유럽과는 약간 다르지만 [[마오쩌둥]]이나 [[김일성]], [[엔베르 호자]]는 이전의 소련 꼬붕을 했던 노선을 폐기하고 독자 노선을 천명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